[앱수필] 고추장 좀 주쇼 >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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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새희망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7회 작성일 19-10-08 17:43

[앱수필] 고추장 좀 주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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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9-10-08 17:43
글: 김영배 신부
출처: 요란한 꽹과리(성바오로출판사)
“열두 시가 넘었으니 어디 가서 점심이나 얻어먹고 갑시다.” 수녀님과 교리 교사 한 사람을 오토바이 꽁무니에 달고 공소에 갔다 오는 길이었다.

 만난 지도 오래되었고 흉허물 없이 점심 한 끼 해 달라고 해도 될 만한 교우 집을 찾아 들었다. 예고 없이 나타난 불청객이었지만 양말발로 뛰어나와 반가이 맞아 준다.
“나 점심 한 끼 얻어 먹으러 들어왔습니다.” “지금이 몇 신데 아직 점심도 못하시고 공소를 다니세요? 어서 방으로 들어가세요.” 이 집에 난리가 났다. 시오 리는 가야 장터가 있고 오 리는 가야 버스를 탈 수 있는 벽지 공소에 느닷없이 신부, 수녀가 들이 닥쳤으니 알 만도 하다.
“너는 빨리 밭에 갔다 오고, 너는 가서 물 길어 와라, 너는 오빠 좀 찾아오고, 넌 가서 열무 좀 씻어 오너라,” 온 집안 식구가 여기서 부딪치고 저기서 부딪히는 걸 보니 꽤나 당황한 모양이다. 그런데 이거 야단났다. 때를 거르지 말고 조금씩 자주 먹으라는 의사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던 나는 허기가 졌다.
혹시나 하고 부엌을 내다보면 아직도 온통 연기가 자욱한 부엌에서 눈물을 흘리며 불을 때고 있다. 벽만 쳐다보고 있기를 두 시간, 이제는 지칠 대로 지쳐서 눕고 싶은 생각밖에 없다.
“점심이 아직 안 되었거든 저녁을 먼저 먹고 점심은 천천히 해서 먹읍시다.”하고 농담을 했더니 이 양반 급한 마음에 얼른 상을 가져오느라고 하마터면 밥상을 들고 곤두박질을 할 뻔했다. 드디어 밥상이 들어왔다. 그러나 우리 셋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서로 얼굴만 쳐다보았다.
공교롭게도 세 사람 모두 위장병 환자라서 음식을 가려 먹어야 처지였다. 자극성 있는 음식이나 섬유질이 강한 음식은 피하라는 의사의 지시가 생각났다. 그러나 밥상을 내려다보니 어쩌면 그렇게도 철저하게 금지된 음식뿐이었을까?
식기에 들어있는 것보다 위로 올라간 것이 더 많게 수북이 쌓인 보리밥, 고춧가루가 시뻘겋게 금방 절인 열무 김치, 풋고추와 마늘을 다져 넣은 된장, 밥솥에 함께 찐 호박잎, 풋고추를 쑹덩쑹덩 썰어 넣고 얼큰하게 끓인 된장찍개, 털도 벗기지 않고 밥에 찐 야무진 옥수수 몇 자루...

 주인이 물을 가지러 나간 사이에 한마디 했다.
“아무 소리 하지 말고 맛있게 먹읍시다.” 수저를 들긴 들었으나 어디에 먼저 손을 대야 할지 몰랐다. 나는 밥을 반쯤 덜어 대접에 쏟아 넣고 열무김치를 푹 쏟다시피 한줌 넣었다. “고추장 좀 주쇼.” “아이구 내 정신 좀 봐. 반찬이 하도 많아서 고추장도 빠뜨렸네.”
나는 참으로 맛있게 먹었다. 먹고 난 후에 느낄 통증을 생각하니 아찔했다. 그러나 ‘의사 제까짓 게 뭘 안다고! 하느님이 주신 음식인데...’하며 속으로 뇌까렸다.
평소같으면 수저도 놓기 전에 배를 움켜잡고 뒤로 뛰었을 텐데 그날은 속이 아주 편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그 집을 빠져 나와, 손을 흔들던 교우가 길 모퉁이에서 가려 사라진 후에 우리 셋은 한바탕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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